머릿말
올해로 故 霞隱 鄭台鉉박사님께서 誕生하신지 112년이 되었고, 成均館 大學校에 赴任하신 것은 50년, 成均館大學校를 停年退任하시고 霞隱生物 學賞을 制定하신지 26년, 그리고 作故하신지 만23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每 年 선생님께서 制定하신 霞隱生物學賞 施賞式에서 霞隱선생님을 追慕하고 그분의 業績을 기려왔지만, 늘 不足한 心情이었습니다. 물론 1981년 10週忌때 선생 님의 遺稿를 出版하여 記念式에서 奉呈한 일이 있지만, 事實 意圖한 만큼 洽足 하지는 못했고, 誕生 100周年때도 별다른 記念行事 없이 지나치는 累를 犯했습니다. 此際에 昨年 제25회 霞隱生物學賞 施賞式 後에 열린 理事會에서 그간 25 회 受賞 內容에 대해 整理하면서 霞隱선생님을 다시 한번 回顧하고자 하는 뜻 에서 이 冊을 出刊하기로 決定하였습니다.
이 冊에 李愚詰박사님이 쓴 傳記로 故 霞隱 鄭台鉉박사님의 生涯에 대해서 昭詳히 알 수 있고, 10週忌 記念 座談會의 記錄으로 霞隱선생님과 함께 生活하신 몇 분들이 겪은 여러가지 逸話와 그분에 대한 人間性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주로 이 賞의 지나온 來歷에 대해서 몇마디 記述하고자 합니다.
霞隱生物學賞은 霞隱선생님께서 1968년 受賞하신 5.16民族賞의 賞金으로 制定하셨는데, 1968년 6월 22일 香珍식당에서 開催된 創立總會에 參席했던 분은 霞隱선생님, 申爽鎬, 李敏載, 李載斗, 金澤泳, 朴相允, 金顯昌, 鄭英昊박사님으로 設立趣旨文, 定款 및 施賞規定을 確定하셨습니다. 또한 初代 理事長에 霞 隱선생님께서 就任하셨고, 理事로는 創立總會에 參席한 全員과 霞隱선생님의 長 男 鄭淳雄씨가 委囑되었습니다. 霞隱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植物分類學賞을 制 定할까하고 생각하셨으나 周圍분들의 勸誘로 生物學賞을 만드시게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生物學을 工夫하고 硏究하는 後學들을 褒賞을 통해 激勵하시려는 그분의 뜻은 分明하셨고, 이는 다음의 霞隱生物學賞 設立 趣旨文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産業은 後進性을 免치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가지 要因이 있 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重要한 要因의 하나는 基礎科學의 硏究가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基礎科學의 發展 없이는 眞正한 우리의 産業發展을 期할 수 없는 것이다. 特히 農業, 醫藥, 畜産等의 分野의 發展은 우리나라 生物의 硏究 없이 는 이룩할 수 없는 일이다. 特히 生物分野는 地域性이 强調되고 있기 때문에 그 硏究는 더욱 重要하다. 이러한 뜻에서 霞隱生物學賞을 制定하여 生物學 分野에 서 發表된 優秀한 論文에 대하여 褒賞하고 보다 좋은 硏究業績이 나오도록 激 勵하고자 한다.”(이태릭 글자는 文脈上 筆者가 添加함).
이렇게 해서 誕生된 本 霞隱生物學賞은 그간 한해도 빠짐없이 授與되어 왔고 發展되어 왔습니다. 賞의 定款에 理事長은 霞隱선생님의 家族에서 나오기 로 되어 있고 理事는 理事長이 任命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霞隱선생님 께서 賞 制定 3년후인 19기년 11월 21일 作故하신 다음에는 사모님이신 張敬恩 여사가 맡으셨고 實質的인 일은 長男인 鄭淳雄씨가 代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도 1988년 別世하였고 1989년 1월에 사모님도 돌아가심으로서 國內에는 遺族 이 없어, 美國에 있는 宗孫인 鄭洪采씨가 3代 理事長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 나 1991년 7월 鄭洪采씨가 辭意를 表明하여 困難하던 차에 마침 霞隱선생님의 막내딸인 鄭淳喜여사가 歸國하므로써 鄭여사가 4代 理事長을 歷任하게 되어 現 在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理事는 여러명이므로 일일이 列擧하는 것은 省略하기로 하고, 그간의 常任理事의 變動事項을 보면 1968-1972년까지의 첫5년을 朴相允교수가 맡았고, 1973-1979년까지 7년을 蘇仁永교수가, 1980-1981년까지 2년을 成耆昌교수가, 1982-현재까지 本人이 맡아오고 있고, 제가 1989년 9월부터 1 년간 硏究出張으 로 英國에 가 있는 동안 崔炳來교수가 맡았었습니다.
이외에 賞에 關聯된 몇 가지 狀況을 紹介하고자 합니다. 霞隱生物學賞의 賞金은 原來 霞隱선생님이 寄託한 100만원의 利殖으로부터 나왔으나 막상 寄託 金을 受託利用하고 있던 선생님의 長男 鄭淳雄사장이 別世하면서 賞은 存廢 危 機를 맞게 되었고, 다음해에 사모님까지 돌아가심으로써 賞을 維持하기 위한 基 金의 確保가 切實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基金에 관해서는 理事會 와 別途로 事業委員會를 두어 韓國植物圖鑑을 原色으로 出刊하여 그 版權으로 나오는 收入을 基金化하자는 論議가 일찌기 1986년부터 있어는 왔지 만 出刊의 進陟이 없던 터였습니다. 따라서 1989년 사모님의 葬禮式때 몇명의 遺族과 理事들이 모여 基金造成計劃을 論議하게 되었고 그해 理事會에서 正式 으로 認准하였습니다. 當時에는 賞金이 100만원이었으므로, 3,000만원의 基金을 確保하면 充分할 것으로 보고 遺族, 成大生物學科 同窓會, 그리고 霞隱 原色植 物圖鑑 版權으로 각각 1,000만원씩을 3년내에 募金하자고 意見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 計劃도 如意치 않아 鄭淳喜이사장의 私財로부터 賞金 및 運營資金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분들중에서 가장 선생님과 因緣이 깊었던 李載斗 이사께서 1991년 停年退任을 하게 되면서 基金 1,000만원을 寄託하고 이에 鄭英 昊이사와 李賢順이사가 300만원씩을 내어 加勢하였고, 鄭淳喜이사장이 1,400만 원을 채워 일단 募金計劃은 達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賞金과 物價가 上昇하여 이 基金도 充分치 못함을 理解하고 1993년에 白龍均이사가 300만원, 鄭 英昊이사와 李賢順이사가 다시 200만원씩을 追加 寄託하므로써 霞隱生物學賞 은 未弱하나마 本軌道에 오르게된 것입니다.
施賞內容은 賞牌외에 副賞으로 純金메달과 賞金을 주는데, 賞金은 1-2회(1969-70년)에는 10만원, 3-9회 (1971-77년)는 20만원, 10-13회 (1978-81년)는 50만원, 14-22회 (1982-90년)는 100만원, 23-25회(1991-93년)는 200만원, 그리 고 26회(1994년)부터는 300만원으로 增額되었습니다. 아직도 다른 賞에 비해 賞金이 적은 感도 있지만, 그럼에도 不拘하고 生物學界에서는 가장 긴 歷史와 傳統을 가진 權威있는 賞으로 널리 認定받고 있는 實情입니다.
故 霞隱 鄭台鉉박사님은 일찌기 植物分類學을 傳受받으시어, 舊韓末時代, 日帝時代, 解放後 混亂期와 6.25事變, 그리고 그 이후 李承晚 政權末期, 張勉 過 渡政府와 朴正熙軍事政權 時期에 이르는 變化無雙한 政治 社會 狀況안에서 모름지기 植物分類學에만 專念하시어 그 基礎를 놓으시고 많은 著述을 남기셨으며 後學을 養成하므로써 우리나라의 植物分類學, 나아가서는 生物學을 發展시키는데 혁혁한 功을 세우신 韓國 生物學의 泰斗이십니다. 그리고 本 霞隱生物學賞을 制定하셔서 繼續 우리를 激勵하고 계시니 선생님의 功績과 恩惠는 筆舌로 不足할 줄 압니다. 작으나마 이 冊을 通해서 선생님의 遺德을 기리고 그분의 弟子 또는 後學으로서의 召命을 銘心하여 우리가 하는 일에 더욱 邁進한다면 바로 이것이 靈界에 계신 霞隱선생님께서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冊이 나올 수 있도록 모든 配慮를 아끼지 않으신 鄭淳喜이사장님, 傳記 를 써주신 霞隱선생님의 首弟子 李愚詰박사님, 10週忌 座談會 記錄을 남겨주신 당시의 常任理事 蘇仁永박사님, 題字를 揮毫해주신 成大儒學大學의 友山 宋河璟 박사님, 原槁를 打字하고 入力하며 本賞에 關係된 모든 일에 저를 補助해준 大 學院生 朴城佑군에게 깊은 感謝를 드립니다.
1994 년 10 월 25 일
霞隱生物學賞 常任理事 李相泰